한국 호랑이를 그리워 함-호랑이를 만난 이야기
한국호랑이는 살아
있다
동물학자들은 호랑이가 이 땅에서 완전히 멸종되었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길이 끊어진 험한 산을 전문적으로 다니는 산악인이나 약초꾼들, 혹은 큰 산 밑에 사는 마을 주민들 중에는 최근에 호랑이를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이들의 말을 모두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턱대고 헛된 것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실제로 호랑이와 산 속에서 마주쳤거나 발자국을 본 사람, 울음소리를 들은 사람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도 20년 동안을 깊고 험한 산들을 내 집 마당처럼 다니면서 적어도 네 차례 이상 호랑이와 마주친 적이 있는 사람이다. 가장 최근에 만난 것은 7년 전, 가야산에서였다. 그 중에 한 번은 5분 동안이나 황소만한 호랑이가 내 뒤를 따라오기도 했다. 호랑이는 분명히 우리나라 남한 땅 여러 곳에 살아남아 있다.
호랑이가 몹시 희귀한 만큼 그 생태와 위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보통 사람들은 그저 옛날 이야기에 흔히 나오고 동물원에서 본 것으로 막연한 추측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호랑이를 범이라 한다. 이밖에 줄범, 갈범, 호(虎), 대호(大虎), 산군(山君), 대충(大蟲), 산중호걸(山中豪傑), 산신(山神) 등으로도 부른다. 그러나 호랑이의 본디 우리말은 범이었던 것 같다.
호랑이를 한 번 산 속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그 대부분이 엄청난 위용에 압도되어 그 자리에서 놀라 죽거나 기절하고 아니면 정신이 나가서 미쳐 버리게 된다. 호랑이의 무서운 위용을 동물원에서 우리에 갇힌 것을 보는 것이나 텔레비전에서 그림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그 참모습을 상상할 수도 없다. 옛날에는 산에서 나무꾼들이나 약초꾼, 산나물 채취꾼, 머루 다래 같은 산열매를 채취하는 사람들이 산에서 호랑이를 만나 놀라서 죽거나 미쳐버린 사람이 웬만한 산골마을에는 한둘씩 있었다.
호랑이는 머리가 크다. 지름이 60센티미터를 넘는 오각형의 머리는 크기가 쌀가마니 만하고, 두 눈은 왕방울 만큼 크고 형형한 빛을 내뿜어 마치 불꽃을 퉁기는 듯하여 웬만한 짐승은 그 눈빛만 보고 까무러치고 만다. 또 이 눈빛은 밤에는 불빛처럼 번쩍거려 10리쯤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강철같이 뾰족하고 눈처럼 휜 수염은 길이가 30센티미터가 넘고, 이빨은 굵고 예리해서 단번에 큰 황소의 목뼈를 부수어 버릴 수 있으며, 발톱 또한 크고 날카로워서 멧돼지 같은 것은 단 일격에 머리를 박살내어 버린다. 또한 목소리도 크고 우렁차서 한 번 포효하면 온 산천이 흔들리는 듯하다.
호랑이가 사람을 삼킬 듯이 그 큰 입을 벌리고 산을 무너뜨릴 듯한 소리로 으르렁대며 불꽃이 흐르는 듯한 눈으로 노려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졸지에 중추신경이 마비되어 자신도 모르게 똥오줌을 싸며 전신이 마비되어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머리카락이 곤두선 채로 넘어져 죽고 말 것이다.
살아 있는 호랑이는커녕 죽어 있는 호랑이만 보고도 웬만큼 담력이 센 사람이 아니고서는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 못한다. 죽은 호랑이도 산사람을 놀라 자빠지게 할 만큼 위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호랑이는 동아시아 특산이다. 섬으로는 발리나 수마트라에 살고 있다. 호랑이의 종류로는 한국범, 우수리범, 벵골범, 인도지나범, 중국범 따위로 나누는데 서식지역에 따라 몸집과 털 빛깔이 차이가 난다. 여러 종류의 호랑이 가운데서 한국 호랑이가 크고 털 빛깔이 가장 아름답고 덩치도 제일 큰 편에 든다. 덩치 크고 용맹스러우며 털 빛깔이 아름다운 한국 호랑이는 거의 멸종되고 백두산 지역에 열 마리쯤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남한에서 호랑이를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곳은 지리산, 설악산, 오대산, 가야산, 팔공산, 두타산, 강원도 화천지방 등이다.
지은이는 가야산에서 두 번 팔공산에서 한 번, 그리고 지리산에서 한 번 호랑이를 목격한 적이 있다.
지은이가 호랑이를 처음 만난 것은 열두 살 때다. 경북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의 뒷산인 가야산 진대밭골에서였다. 어머니와 함께 해인사 관광촌에 목기장이였던 아버지가 깎은 목기를 팔러 갔다가 돌아오던 중에 날이 저물었다. 날이 완전히 어둡기 전에 코백이재라는 험한 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마음에 걸음을 빨리 옮겼다. 진대밭골 한가운데를 흐르는 개울을 건너 키를 넘는 갈대밭을 우수수 소리를 내며 지나 막 이깔나무 숲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길 위쪽 키 작은 나무들이 우거진 산비탈에서 우두둑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 쪽을 보니 누렇고 큰 짐승이 큰 새 한 마리를 뒤쫓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집에서 키우는 큰 개가 따라온 것이라 생각하고 “엄마, 저기 우리 개 왔다.”고 했더니 어머니는 “저거 개 아니다, 빨리 가자”면서 발걸음만 재촉하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나는 그 큰 짐승이 개가 아니고 호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마 호랑이가 뒤쫓고 있던 큰 새는 부엉이일 것으로 짐작된다.
‘호랑이 앞길을 부엉이가 인도한다’는 옛말이 있고, 또 호랑이는 부엉이와 장난하기를 좋아한다는 어른들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부엉이와 호랑이는 서로 공생관계라고 한다. 다 같이 야행성인 이 동물들은 부엉이가 하늘에 높이 떠서 호랑이의 먹이가 될 만한 짐승을 찾아내어 호랑이한테 울음소리로 신호를 보내주면 호랑이가 먹이를 사냥하여 먹고 남은 먹이를 부엉이가 먹는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18년 뒤인 1989년에 나는 옛날에 수백 번을 넘어 다녔던 불귀재와 진대밭골을 혼자 찾아갔다. 불귀재는 18년 동안 사람이 전혀 다니지 않아 옛날 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큰 나무들과 칡넝쿨, 다래넝쿨, 미역줄나무 넝쿨들이 우거져 방향을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여름철이나 낮에는 몹시 무더웠으므로 해가 있는 동안 산아래 마을인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 개금불 마을에서 나무 그늘에서 쉬고 해거름 무렵이 되어서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간신히 옛날 길의 흔적을 찾아 큰 돌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던 곳 가까이 왔을 때는 날이 이미 어두워 오는 중이었다. 옛날에 우람했던 돌배나무는 말라죽어 썩은 그루터기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썩은 돌배나무를 지나 칡넝쿨이 우거진 내리막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길 밑 칡넝쿨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노루가 저녁식사로 칡넝쿨을 뜯어먹는 소리겠지 하고 몇 걸음 더 내려가 모퉁이를 돌려고 할 때, 길 아래쪽 3~4미터 떨어진 칡넝쿨 속에서 엄청나게 큰 짐승이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호랑이였다.
털 빛깔은 동물원이나 텔레비전에서 본 호랑이의 털 빛깔처럼 황갈색이 아니라 찬란한 황금빛이었고 황금빛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선명했다. 황소만큼 큰 호랑이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그것은 황소보다 더 컸다.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가 적어도 4미터는 될 것 같았다.
호랑이는 꼬리를 길게 뻗힌 채 천천히 칡넝쿨 밖으로 나오더니 큰 머리를 들어 불덩이 같은 눈으로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조용히 칡넝쿨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저놈이 나를 해칠 뜻이 있었다면 내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해쳤을 것이라는 생각에 적이 안심이 되어 애써 태연한 척 하며 산을 내려왔는데 온몸이 땀에 젖어 마치 비를 맞은 듯하였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호랑이는 칡덩굴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다가 다시 나와 길 아래쪽으로 6-7미터쯤의 거리를 두고 내 뒤를 계속 따라왔다. 5백 미터쯤 내 뒤를 따라오다가 내가 다리가 후들거려 잠깐 길바닥에 주저앉아 쉬려고 하는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1981년에 약초꾼 노인 두 사람과 함께 대구 근처에 있는 팔공산으로 약초를 캐러 갔다. 하루 종일 약초를 찾아 여러 골짜기와 능선을 샅샅이 훑었으나 약초를 별로 캐지 못하고 해거름 무렵에 팔공산에서 가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있는 작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그 골짜기에는 세신이라는 약초가 많았다. 그 무렵 세신은 값이 제법 비싸서 하루에 한 근쯤을 캐면 충분히 하루벌이가 되었다. 나는 세신을 열심히 캐면서 노인들보다 30~40미터쯤 앞서서 나아갔다. 부지런히 약초를 캐면서 으슥한 골짜기로 들어서서 골짜기를 따라 올라갔다. 그 골짜기에 들어서자마자 무언가 섬뜩한 기분이 들고 소름이 오싹 끼치며 머리칼이 곤두섰으나 약초가 많았으므로 열심히 약초를 캐며 골짜기를 천천히 올라갔다. 한 50미터쯤 올라갔을까. 갑자기 머리칼이 쭈뼛 일어서는 듯하여 고개를 들었다. 바로 3~4미터 앞에 나뭇잎 사이로 시퍼런 불덩어리 두 개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내가 놀라서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엄청나게 크고 날카로운 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사람의 머리쯤은 한입에 들어갈 만큼 큰 입에 손가락만큼 굵고 날카로운 이빨이 번쩍였다. 나는 정신이 아득했다. 이제 죽는구나 싶었다. 그 때 산에서 큰 짐승을 만나면 절대로 눈을 떼지 말고 그놈을 노려보면 어떤 무서운 짐승도 도망간다는 어른들의 말이 떠올랐다. 호랑이한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하지 않는가. 만약 내가 당황하여 눈을 떼거나 자세가 흐트러진다면 저놈이 나를 덮칠 것이다. 나는 애써 몸을 가누고 불이 철철 흐르는 듯한 눈을 노려보면서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온 몸에서 식은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천천히 10미터쯤을 뒷걸음질쳐서 골짜기 바깥쪽으로 벗어나자 나는 몸을 돌려 능선 쪽으로 나왔다. 그 때 30~40미터쯤 뒤에서 따라오던 노인들이 내가 얼굴이 흙빛이 되어 다리를 후들거리며 나오는 것을 보고는 조금 전에 난 소리가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노인들은 호랑이를 보지는 못했지만 소리는 들었던 것이다.
산에서는 호랑이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큰 짐승이라고 하거나 산임금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므로 나는 아마 멧돼지 소리인 것 같다고 대답했다. 노인들은 그 소리와 내 얼굴을 보고 그것이 호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노인들은 약초망태며 괭이를 그 자리에 던져 버리고는 정신없이 산 밑으로 내달리는데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젊은 내가 따라 갈 수 없을 정도였다.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고 바위를 뛰어넘는 것이 마치 산짐승처럼 날렵했다. 마을 가까이 와서야 노인들은 ‘여보게, 우리 약초 안 캐도 먹고 산다, 앞으로 다시는 산에 가지 않겠네.’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과연 그 노인들은 그 이후로 절대로 약초를 캐러 산에 가지 않았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호랑이가 큰 소리로 한 번 포효하고 나니 온 산이 쥐죽은 듯이 조용해지는 것이었다. 그전에는 새소리, 풀벌레소리로 산이 온통 시끄러웠으나 호랑이가 한 번 소리를 지르고 나니 개미 움직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온 산이 물을 뿌린 듯 조용해졌다. 과연 호랑이가 뭇 짐승들의 왕임에 틀림없다.
보통 사자를 ‘백수의 왕’이라고 한다. 이것은 서양 사람들이 호랑이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 사나움이나 신출귀몰함, 권모술수에 있어서 사자는 도저히 호랑이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또 큰 황소를 물고 3미터 높이의 담을 뛰어넘는 힘이나 몸집의 크기에 있어서만도 사자와 견줄 바가 아니다.
열대나 아열대 지방에 사는 호랑이는 사자와 같이 몸무게가 1백20-1백50킬로그램에 지나지 않으나 한국 호랑이는 2백-2백30킬로그램이나 된다.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 호랑이의 평균 몸길이가 2미터 30센티미터인 것에 견주어 아프리카 사자는 평균 몸길이가 1미터90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것을 보아도 한국 호랑이가 사자보다 우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호랑이의 털가죽은 빛깔이나 품질이 세계 으뜸이다. 한국 호랑이는 머리부분이 시베리아 호랑이보다 약간 작고 털가죽 빛깔은 황갈색 바탕에 검정 줄무늬가 아주 선명하며 배 부위의 털이 눈처럼 휜 것이 특징이다.
호랑이는 고독을 즐기는 짐승이다.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생식기간 말고는 결코 여러 마리씩 몰려 다니지 않고 혼자 생활한다. 호랑이는 보통 일부일처의 원칙을 지키며 새끼가 나서 자라 완전히 독립하기 전까지는 한 가족으로 공동생활을 한다.
옛 민담에 수컷 호랑이의 성기가 불처럼 뜨거워서 사람이 그걸 붙잡으려다 손에 화상을 입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더러 나온다. 호랑이의 성기는 생김새가 기이하다. 대개 수컷 호랑이의 성기는 길이가 30센티미터에서 50센티미터쯤 되는데 그 모양이 마치 옛날 힘센 장수들이 휘두르는 무기인 철퇴처럼 생겼다. 긴 막대기에 날카로운 바늘이 수십 개 돌아가며 꽂혀 있는 모양이다. 바늘이 낚시 바늘처럼 안쪽으로 굽어 있어서 한 번 들어가면 빠져 나오기 어렵고 억지로 빼냈다간 암컷이 성기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호랑이는 서로 궁합이 맞지 않으면 교미 중에 암컷이 죽는다는 말이 있다. 수호랑이 성기를 대문이나 방문 위에 걸어 두면 잡귀가 침범하지 못한다 하여 요즘에도 이것을 구하려는 사람이 드물지 않다.
호랑이는 바람을 매우 싫어하며 바람이 많은 날에는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서 사람을 습격하는 수가 있다. 그래서 옛말에 ‘구름 일면 용이 나타나고 바람 일면 호랑이가 나타난다’는 속담이 있다.
그 이유는 호랑이를 비롯한 고양이과 동물들은 후각이 그다지 날카롭지 못하여 대개 시각이나 청각에 의존하여 사냥을 하는데, 바람이 심하면 청각이 방해되어 사냥감이 되는 동물들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잘 놀라는 것이다.
호랑이는 대개 낮에는 풀 속에서 잠을 자고 밤이 되면 활동을 시작한다. 먹이로는 소, 말, 사슴, 노루, 멧돼지, 토끼 등 모든 짐승을 잡아먹는다. 날짐승인 꿩까지도 번개같이 앞발로 쳐서 잡아먹는다.
호랑이가 제일 좋아하는 먹이는 개다. 그래서 옛날에는 개를 잡아먹으려고 호랑이가 마을로 내려오는 일이 많았다. 호랑이가 개고기를 좋아하는 습성을 잘 이용하면 호랑이를 사로잡을 수가 있다.
호랑이를 사로잡으려면 큰 누렁개를 한 마리 산으로 끌고 올라가서 호랑이가 다닐 만한 곳에 말뚝을 박고 개를 매어둔다. 그런 다음에 멀리 숨어 지켜보고 있으면 밤중에 호랑이가 나타나서 크게 한번 포효를 한 다음에 공포에 떨고 있는 개 주위를 빙빙 돌며 덩실덩실 춤을 춘다. 호랑이가 춤을 추다니 그런 일이 있을 리 없다고 하겠지만, 실제로 호랑이는 맛있는 먹이가 눈앞에 있으면 몸을 이리저리 뒹굴며 꼭 사람이 춤을 추는 것처럼 춤을 추는 특성이 있다.
한참 동안 춤을 추고 나서 호랑이는 마침내 개한테 다가가 넋이 빠져 오들오들 떨고 있는 개를 앞발로 일격에 낚아채어 3-4미터 높이로 공중에 휙 던진다. 공중으로 올라간 개가 떨어지면 다시 받아 던지기를 공기놀이하듯 반복하여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아 어르듯이 어른다. 이처럼 개를 단번에 죽이지 않고 한참동안 어르는 것은 피가 간을 비롯한 내장으로 모이게 하기 위해서다. 사람을 비롯한 포유동물은 공포를 느끼면 온몸의 피가 내장으로 모이게 된다. 이것은 외부의 공포로부터 내장을 보호하려는 본능이다. 사람이 공포를 느낄 때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살갗에 소름이 돋는 것은 피가 내장으로 모이기 때문이다.
한참을 어르면 개는 극도의 공포에 지쳐 낑낑 소리도 내지 못하고 축 늘어져서 죽은 것처럼 된다. 그 때 앞발로 일격을 가하여 내장을 드러나게 한 다음에 먼저 내장에 고여 있는 피를 마신 다음 내장을 먹고 나중에 살코기를 먹고 배가 고프면 마지막으로 머리를 먹는다.
개를 잡아먹고 나면 호랑이는 20-30분 뒤부터 잠을 자기 시작한다. 개고기는 호랑이한테 마치 술이나 마약, 수면제 같은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호랑이가 개를 먹고 잠들었을 때에는 사람이 발로 차고 꼬집어도 깨지 않을 만큼 깊이 잠이 든다. 드르릉 드르릉 마치 사람이 코고는 소리 비슷한 소리를 내면서 완전히 곯아떨어져서는 두세 시간 뒤에야 깨어나게 된다. 이럴 때 호랑이를 사로잡기는 쉽다. 단단한 밧줄로 네 발과 입을 꽁꽁 묶어 여러 사람이 메고 내려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호랑이는 정(情)이 깊고 모성이나 효성이 지극하며 사람과도 깊은 우정을 맺을 수 있는 짐승이다.
옛날 이야기에는 산 속에서 생활하는 도사(道士)나 선사(禪師)들이 큰 호랑이를 개처럼 데리고 다니거나 말처럼 타고 다닌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결코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를테면 호랑이 젖먹이를 사로잡아서 양이나 개를 유모로 하여 키운다. 이렇게 자란 호랑이는 훗날 그 몸집이 유모인 양이나 개보다 몇 배나 크고 힘이 셀지라도 그 유모한테는 언제나 존경하고 따르는 태도를 보인다. 이것은 사람한테도 마찬가지다. 호랑이 새끼를 어려서부터 먹이를 주어 키우면서 길을 들이면 어떤 영리한 개보다도 주인을 충성스럽게 따른다.
50년쯤 전에 경기도 가평군 북면에 있는 칼봉산 속에 안씨 성을 가진 도인이 살았다. 그 도인은 바위를 깨어 굴을 만들어 그 속에서만 지내고 밖으로 나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어느 눈이 하얗게 쌓인 겨울 날에 열대여섯 살 된 엄용수라는 소년이 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갔다가 눈 위에 선명하게 찍힌 국화꽃 모양의 호랑이 발자국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호기심에 발자국을 따라 갔더니 호랑이 발자국은 바로 안 도인이 사는 바위굴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안 도인이 호랑이에게 잡아 먹혔을 거라고 생각한 엄용수 소년은 혼비백산하여 마을로 급히 도망치려고 하는데 굴속에서 “용수야, 이리 오너라”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도인이 굴 밖으로 걸어 나오고 큰 호랑이가 뒤따라 나왔다. 무서워서 오줌을 싸고 있는 엄용수 소년에게 안 도인이 가까이 와서는 “무서워할 것 없다, 이 짐승은 내 심부름꾼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뒤로 몇 번 엄용수 소년은 안 도인을 만나 친해졌는데, 안도인은 호랑이뿐만 아니라 노루, 까치 같은 짐승들과도 친하게 지내고 의사소통을 할 줄 알았다고 한다. 안도인은 5년쯤 더 칼봉산에서 지내다가 다른 곳으로 떠났고, 엄용수 소년은 칼봉산, 명지산, 화악산 일대의 멧돼지, 노루, 토끼 같은 산짐승을 잡는 사냥꾼이 되었다. 엄용수는 지금 예순다섯 살로 경기도 가평에서 살고 있다.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곧 해인사 아래 마을에 살던 ‘허주’라는 사람도 호랑이와 친하게 지낸 사람이었다. 그는 힘이 장사인 데다 담력이 세고 의협심이 강한 기인이었다.
그는 술을 몹시 좋아하여 밤늦도록 주막에서 술을 마시기 예사였는데, 거나하게 취해서 혼자 산길을 갈 때면 반드시 호랑이가 나타나서 따라다니며 보호를 해주었다고 한다. 그는 가족도 없이 혼자 살다가 30년쯤 전에 죽었다.
제정 러시아 때에 한 러시아인 의사가 젖먹이 호랑이 한 마리를 길렀다. 3년쯤 지나자 호랑이는 장성하여 큰 호랑이가 되었는데 의사는 어디를 가든지 호랑이를 개처럼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만나는 사람마다 호랑이를 무서워하고, 또 동네의 개들도 미칠 듯이 짖어 대곤 하여 마을 사람들의 반대가 심하므로 어쩔 수 없이 호랑이를 장사꾼에게 팔아 버렸다.
그 후에 바로 제1차 세계전쟁이 터졌고 의사는 전장에 나가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 버렸다. 포로생활을 몇 해 하는 동안 전쟁이 끝나고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러시아는 이미 공산주의 혁명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랑생활을 하는 중에 지중해 연안에 있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름난 곡마단 쇼를 구경하게 되었다. 곡마단의 포스터에는 “밀림에서 갓 잡아온 맹수를 마음대로 부린다. 관객 가운데 누구든지 이 맹수들의 쇠울타리 안에 들어갈 용기가 있는 사람한테는 5만 달러를 주겠다”고 적혀 있었다.
그는 고된 삶에 지쳤고 전에 키우던 호랑이 생각이 나서 서슴지 않고 뱅골 호랑이와 시베리아 호랑이, 그리고 사자 한 마리가 들어 있는 우리 속으로 들어갔다. 낮선 사람이 들어오자 맹수들이 일어나 얼마쯤 노려보다가 사자와 뱅골 호랑이가 우렁찬 소리를 지르면서 그에게 번개같이 덤벼들었다. 맹수의 일격에 몸이 찢기려는 찰나에 거대한 시베리아 호랑이가 그 사이에 뛰어들어 공격을 막아내고는 엄청난 포효를 내질렀다.
호랑이는 다른 맹수들을 구석으로 몰아버리고는 그 의사에게 다가와 공손히 머리를 숙였고 그 의사는 호랑이 목을 얼싸안고 함께 뒹굴었다. 호랑이는 입으로 사람의 목을 문질러 대고, 발로 등을 어루만지며 좋아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호랑이는 10년 전에 그 의사가 키우다가 마을 사람들의 항의에 못 견뎌 동물상인에게 팔았던 그 호랑이였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 의사와 다시 헤어진 호랑이는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굶어죽었다고 한다.
<산해경(山海經)>이라는 옛 중국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온다. “군자국(君子國) 사람들은 호랑이를 우리 안에 키우는데 나들이할 때에는 개처럼 데리고 다니기도 하고,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며 말처럼 타고 다니기도 한다. 저자에 흔히 호랑이가 사람들 사이로 어슬렁거리며 다니지만 사람을 해치는 일은 없다.”
군자국은 바로 우리나라를 뜻한다. 우리 옛 조상들은 호랑이를 길들여 타고 다니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호랑이를 길들여 타고 다니던 용맹스런 사람들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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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1992년 정월호 월간 시사지 <시사춘추>에 실었던 것입니다. 이 글을 쓴 운림은 지금까지 적어도 다섯 차례 넘게 이 나라의 산 속에서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운림 혼자 호랑이를 본 것이 아니라 함께 산에 갔던 약초꾼 노인들도 호랑이를 보았으며 그 노인들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여우와 살쾡이 같은 자들이 설쳐대는 세상에서 진정으로 호랑이 같은 기상을 지닌 사람이 그리워서 내가 만난 호랑이 이야기를 여기에 싣습니다.-운림
출처 : 내가 만난 호랑이
글쓴이 : 운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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